추 지현 | 조회 1858 2011.09.04 18:42
김영수는 법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숨어있는 처지. 때는 긴급조치 등 공포정치의 절정기였던 1975년, 김영수는 조그만
골방에 쳐 박혀서 자신의 뇌뢰와 가슴 속으로 순간순간 뛰어드는 젊은 남자의 실체를 잡기위해 애를 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전태일. 4년 전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를 외치며 스스로를 태워버린 평화시장의 한 노동자. 사망 당시의 나이 겨우 22살. 그의 죽음은 김영수를 비롯한
학생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회각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아직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처음에
김영수에게 전태일은 다만 희미한 윤곽에 존재할 뿐이다. 첫 번째 이미지는 통금 사이렌에 쫓겨 필사적으로 달려 가는 모습이다. 점심을 굻는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곤 야간 작업이 끝난 늦은 시간에 늘 통행금지를 쫓기며 집까지 뛰어야했던 전태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지만 늘 공부를 목말라했고 아버지로부터 근로기준법이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부터 법을 아는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순박한 노동자. 그의 삶을 파고들 수록 김영수는 전태일에게 집착하게 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전태일에게 오버랩시키게
되며, 그 작업은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김영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비상구가 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삶이 역사와 가까워질수록 결단을
요구받았던 것처럼 김영수의 개인적인 삶도 자기희생의 통과제의를 거쳐야만 한다.
김영수에겐 '사랑의 실천'과 '실천의 사랑'을
저울질하는 정순이라는 애인이 있고, 그녀는 공장에 다니면서 현재 영수를 먹여 살리는 입장이기도 하다. 야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정순은 영수를
통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임신한 몸으로도 현실의 난관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김영수에게 다가오던 공권력은 그가 도피해버림으로써 정순에게로
향하게 되고 자신의 고통을 대신 치루는 그녀 때문에 영수는 갈등이 깊어진다. 극장 보일러실에 숨어 있게 된 영수는 각성의 과정을 거쳐 결단의
순간으로 가고 있는 전태일의 정신적 고뇌와 치열하게 맞서며 자기 자신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시대 상황은 점점 나빠진다. 월남이 패망한
것과 동시에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다. 김영수의 행동반경도 제약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보일러실로 정순이 찾아오고 경찰의 미행을 눈치 챈
그는 원고보따리를 챙겨들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 끝에 마침내 경찰을 따돌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시외버스를 타고
아직도 기약없이 어디론가 도피를 하고 있는 김영수와 정순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두 사람만이 아니다. 만삭인 정순의 배 위에 완성된 전태일의
전기가 놓여 있다. 영수는 잠든 아내의 배에 귀를 대본다. 탄생을 예고하는 새로운 생명의 힘찬 숨소리가 들린다. 영수의 귀에는 그것이 분신하던
날에 전태일의 가슴을 울리던 심장의 박동소리로 바뀐다. 불꽃에 휩싸이는 육신의 죽음위로 겹쳐지는 생명의 숨소리를 들으면서.